구윤철 “이르면 금주 내 방미 추진…관세, 국익·실용에 맞게 협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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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부총리는 이날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취임식을 한 뒤 기자들과 만나 방미 일정과 관련, “미국과 협의하고 있다”며 “협의가 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만나 한국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 관세 협상이 최대한 국익과 실용에 맞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미국이 제시한 상호관세 유예기한인 8월1일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한 만큼 이르면 이번주 미국을 방문하는 방안을 조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미 기간 협상 파트너인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 환율 이슈 등을 주제로 회담할 것으로 보인다. 구 부총리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동행 여부에 관해선 “지금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대미 협상을 앞두고 22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통해 부처 간 구체적인 협상 전략을 조율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구 부총리는 단기적 과제로 “수해로 인해 물가, 특히 생활물가를 안정화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국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물가관리를 최우선으로 놓고, 관세 대응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며 “중장기적으로는 혁신을 최대한 빨리하겠다”고 말했다.
법인세 인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 부분도 검토를 하고 있다. 오늘부터 정식적으로 일하게 되니 잘 검토해서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이날 오전 구 부총리는 ‘부총리와 함께하는 혁신 첫걸음-기재부가 달라졌어요’를 주제로 한 강연 형식의 취임식을 통해 “기재부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핵심 사원이 되자”며 “국민주권정부의 주인인 국민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도와줄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부처의 파트너가 돼야 한다”며 “앞에서 이끄는 부처가 아니라 도와주고 밀어주는 부처가 되자”고 말했다. 이어 “혁신적 아이디어로 성과를 내야 한다”며 “대면보고와 대면회의 등 불필요한 형식도 최소화하자”고 했다.
국방부가 12·3 불법계엄 당시 위법한 명령에 따르지 않은 군인들을 찾아 포상하기로 했다. 포상 결과는 승진 인사에 반영할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밝혔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18일 브리핑에서 “국방부 감사관실을 중심으로 12·3 계엄 당시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등 군인 본분을 지켰던 장병들의 사실관계를 조사한다”며 “공이 있는 분에 대한 포상·격려가 실시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불법계엄의 위법성이 명확힌 가려지고 새 정부가 출범해 신상필벌에 착수해도 될 시기라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 대변인은 포상 종류에 대해 “정부·국방부 차원의 포상, 병사는 조기 진급, 간부는 장기복무 선발과 진급심의에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오는 8월과 9월에 각각 예정된 영관급 장교 진급 일정을 뒤로 미룰 계획이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15일 국회 국방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법 비상계엄에 관해 신상필벌을 하고 전 정권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국방부 감사관실 조사는 1~2주 가량 걸릴 예정이다. 감사관실의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 대상은 제한적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감사관실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다고 판단되는 군인들은 검찰에 이첩될 수도 있다.
국방부 감사관실은 먼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에서 일부 사실관계가 드러난 군인들을 먼저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계엄 당시 국회에 출동해 부하들에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지시한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대령),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버 압수 지시가 ‘위법하다’며 따르지 않은 윤비나 방첩사 법무실장(대령) 등의 포상 가능성이 거론된다.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이라 선별 기준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지를 두고는 일부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전 대변인은 “장병들 중 본연의 역할을 다하면서 계엄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사람의 공을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발 무역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유럽연합(EU)과 중국이 오는 24일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무역·안보 등 주요 사안을 논의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EU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무역 질서를 만들어낼지 주목된다.
21일 AP통신에 따르면 이번 정상회담의 쟁점은 EU의 중국산 전기차 관세와 중국의 희토류 수출 정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EU는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불만을 표출해왔고 중국은 자국산 전기차 관세를 내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EU는 중국 전기차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자 2023년부터 반보조금, 반덤핑 조사를 시작해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8.1%의 관세를 부과하는 등 중국을 견제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초 재집권한 뒤 EU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하자 EU와 중국은 ‘화해 무드’로 들어섰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위원은 올해 네 차례 실무협상을 진행하면서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
상호 무역 의존도를 고려하면 중국과 EU가 이번 기회를 통해 대미 공동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양측 모두에 유리한 선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양측 무역 규모는 하루 23억유로(약 3조7000억원)인 것으로 추산되며 중국은 미국에 이어 EU의 두 번째로 큰 교역국이다. 특히 EU는 전자·기계 부품과 의약품 원료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높다.
중국도 미국과 관세 전쟁 휴전 기간이 다음달 끝나는 데다 내수 경기가 침체해 판로를 한 곳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중앙TV의 소셜미디어 매체 위위안탄톈은 지난 7일 양측이 “전기차 관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논의를 거의 마쳤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EU가 역내 산업 보호를 우선시하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무역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EU는 지난해 약 3000억유로(약 485조원) 규모의 대중국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독일 싱크탱크 메르카토르중국연구소의 그제고르츠 스테크 수석분석가는 “EU와 중국은 무역 및 산업 정책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충돌하는 궤도에 있다”며 “중국이 점점 더 절실하게 수출처 확대를 바라게 된 상황은 역내 산업 기반을 보호하려는 EU의 방침과 상충한다”고 분석했다.
양측이 무역 합의를 이뤄내더라도 중국의 안보 위협, 인권침해, 기술 간첩 행위 등 문제로 충돌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입장차도 양측 관계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EU가 중국과 손잡을 경우 미국에 보복당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앞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미국의 동맹국이 중국과 무역 동맹을 맺는 행위는 자신의 목을 베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했다.
김혜순 시인(70)이 시집 <죽음의 자서전> 독일어 번역본(Autobiographie des Todes)으로 독일 세계 문화의 집(HKW)이 수여하는 국제문학상(Internationaler Literaturpreis) 수상자로 선정됐다. 김혜순은 상이 제정된 이래 첫 아시아인 수상자가 됐다.
HKW는 17일(현지시간) 시상식을 열어 올해 국제문학상 최종 후보 6명 가운데 김혜순을 수상자로 호명했다. 다른 최종 후보는 튀르키예의 도안 아칸르, 캐나다의 세라 번스타인, 우크라이나의 안나 멜리코바, 프랑스의 네쥬 시노, 미국의 제스민 워드였다.
“내 이름 불려 너무 놀랐다”…‘그리핀 시 문학상’ 받은 김혜순 시인
심사위원단은 만장일치로 김혜순을 수상자로 지목했다. 위원들은 선정의 말에서 “김혜순 시의 경이로움 속에서 의미는 종종 불가사의함 속에 명확히 드러난다”며 “그 시편들은 리듬을 따라 반복해서 읽을수록 열리고, 이미지는 이미 올바르게 선택한 뒤에야만 비로소 보이게 되는 방향처럼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현재 한국에 있는 김혜순은 독일에서 열린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화상으로 “번역자 박술과 울리아나 볼프, 심사위원들, HKW, 출판사 피셔의 대표 포겔과 편집자 마들렌, 그리고 낭독 행사를 기획한 시 문학관의 마티아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상은 작가와 번역가에게 공동으로 수여되는 것이어서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 시집을 번역한 박술(39)·울리아나 볼프(46) 번역가도 함께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독일 힐데스하임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박술은 비트겐슈타인, 니체, 횔덜린, 트라클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고,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울리아나 볼프 역시 번역과 시 창작을 병행하고 있으며 재미교포 시인 최돈미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한 바 있다. 심사위원들은 번역에 대해서도 “죽음과 대화하려고 하는 출발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달되는 탁월한 번역”이라고 평했다.
<죽음의 자서전>은 문학실험실에서 2016년 출간된 시집이다. 시인이 2015년 지하철역에서 갑자기 몸이 무너지며 쓰러지는 경험을 하면서 영감을 얻었고, 메르스와 세월호 사태 등 사회적 비극을 떠올리며 49편의 시를 써서 엮었다. 올해 2월 독일 출판사 피셔가 번역 출간했다.
국제문학상은 독일어로 번역된 뛰어난 현대문학에 수여하는 상으로 2009년 시상을 시작했다. 상금은 총 3만5000유로(약 5400만원)이며 작가에게 2만유로, 번역가에게 1만5000유로가 주어진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은 2017년 <채식주의자> 독일어 번역본으로 이 상의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혜순 시인은 국내외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날개 환상통>으로 한국인 최초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았으며, 2022년에는 영국 왕립문학협회 국제작가로 선정됐다. 올해에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AAAS) 외국 명예 회원으로 선정됐다.
▼ 고희진 기자 gojin@khan.kr
일곱 살 내게 우상이 생겼다. 구두쇠 엄마를 몇날 며칠 졸라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앨범을 손에 넣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카세트로 서태지 음악을 틀어댔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안무를 따라 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 서태지 흉내를 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서태지가 되어 노래와 안무를 뽐냈다. 내가 하도 서태지를 좋아하자 서울 사는 이모는 당시 서태지가 자주 착용했던 모자와 비슷한 베레모를 선물했다. 나는 신이 나서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잘 때조차 그 모자를 벗지 않았다. 누구도 모자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모자에 달린 가격표는 절대 떼서는 안 되었다. 서태지가 그렇게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의 돋보기를 훔쳐 쓰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난 알아요’를 쉴 새 없이 외쳤다. 도수가 맞지 않는 돋보기가 어질어질 현기증을 일으켰다. 대롱대롱 매달린 가격표가 내 멋의 정점이었다. 종이로 된 가격표가 바람에 날리며 모서리로 내 얼굴을 찔러 댔다. 세차를 하고 있는 친척 오빠 앞에서 서태지를 보여 주었다. 오빠는 낄낄 웃으며 서태지 아니고 ‘수퇘지’라고 나를 골려 댔다. 나는 약이 올라 오빠를 흘겨봤다. 마실을 다녀오던 외할아버지가 다가와 내게서 돋보기를 벗겨 냈다. 어른 물건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된다는 꾸지람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내가 혼이 나는 중에도 오빠는 계속 수퇘지 타령을 하며 나를 놀렸다.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노리고 있던 건지 가위를 들고 다가와 내 모자에 매달린 가격표를 싹둑 잘라 버렸다. 순식간에 당한 뺑소니였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무너졌다. 정말 내가 수퇘지가 돼버린 것 같았다.
중학생 때 봉사활동 간 시설서 맡은 절망의 냄새…이듬해 장애 판정을 받고 그 냄새에 갇혀 살았다그 후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주문처럼 부르며 결심했다, 어떻게든 일어서 살아가기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들었다. 그렇게 아꼈던 모자가 더는 서태지스럽지 않았다. 나는 모자를 내팽개치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세상이 끝난 것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엄마가 다시 실로 가격표를 엮어 모자에 달아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자와 가격표가 분리되는 순간 모자는 그저 평범한 베레모가 되었다. 그러자 서태지를 향한 마음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흥이 식어 버리자 “난 알아요”가 나오지 않았다. 보물처럼 여겼던 서태지 카세트테이프에 먼지가 앉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를 선언하기도 전에 나는 팬을 은퇴했다.
그즈음 동네에 길을 잃은 낯선 이들이 방문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대다수가 노인이었고 바싹 말라 행색이 초라했다. 자신들이 찾아가는 곳이 어딘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단지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라는 정보만 가지고 근교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동네 어른들은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았다. 시내와 떨어진 외딴 터에 양로원과 종교시설이 들어섰다. 시설을 향한 주민들의 인식은 좋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시골 노인들에게 양로원은 자식들이 부모를 고려장 시키는 곳이었다. 행려병자나 장애인들이 전국에서 그 시설로 모여들었다.
내가 시설에 방문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체험 학습 때였다. 학교는 일 년에 한두 번은 시설을 방문해 견학을 시켰다. 그곳에 도착하면 우리는 커다란 강당에서 영상물을 시청해야 했다. 내용은 다리 밑에서 장애인을 돌보던 한 남자의 일생이었다. 마당에는 그의 동상도 있었다. 시설은 가톨릭 신부의 도움으로 확장되었다. 거대한 부지에 건물들이 계속 들어섰다. 나는 매해 그곳을 방문하며 그 과정을 보았다.
90년대 말 금융위기가 나라를 흔들었다. 간혹 땟국물 줄줄 흐르는 장발의 남자가 동네를 돌며 쌀을 구걸하고 다녔다. 어른들은 시설에서 시킨 것 아니냐며 수군댔다. 소문으로는 시설 앞에 매일 아침 노인들과 장애인들이 버려진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루머는 아니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주기적으로 순서를 정해 시설로 봉사활동을 보냈다. 주로 양로원에 배치되어 식사 배식을 돕고 건물 청소를 했다. 봉사활동 전 영상물을 시청하는 것도 여전했다.
양로원은 본관에서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부지는 나날이 넓어지고 없던 건물이 새롭게 들어섰다. 무표정한 수녀님들이 감시하듯 우리를 내다봤다. 양로원에 도착했다. 사실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어린 학생들에게 시킬 일이 뭐 그리 많겠는가. 그저 명목상 봉사활동이었을 뿐이다. 인솔 교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밀폐된 공간에서는 표백제와 노인들의 체취가 뒤섞인 냄새가 났다. 날카로운 악취가 미간을 꾹 찔렀다. 나는 숨을 참았다. 코를 쥔 동급생들도 있었고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애들도 있었다. 이상스럽게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방마다 깡마른 노인들이 빈 동공으로 방문자를 흘깃 살폈다. 어디선가 텔레비전 소리가 흘러나왔다.
봉사자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손걸레를 들고 다니며 청소를 했다. 우물쭈물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점심 배식이 시작되었다. 우두커니 서 있던 학생들에게도 할 일이 생겼다. 반찬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은 멀건 된장국이었다. 오염된 공기 중에 음식 냄새까지 더해지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봉사자 아주머니들이 능숙하게 배식 지시를 했다. 식판을 받아 노인들에게 배달했다. 어느 방에서 다리가 없는 남자가 두 팔로 기어 나와 식판에 코를 박고 된장국을 떠먹었다. 그의 입에서 침과 국물이 뒤섞여 주르륵 흘렀다. 나는 식판을 나르는 척하다가 밖으로 도망쳤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속이 뒤집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신물이 올라왔다. 코에서 표백제와 된장국 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속이 진정되지 않아 싸갔던 김밥도 먹지 않고 자판기에서 콜라만 뽑아 마셨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나는 된장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했다. 된장 냄새만 맡아도 표백제 냄새가 나며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이 났다.
이듬해 나는 장애 판정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시각 장애인이 될 거라고? 내가 왜?’
절망의 올가미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조여 댔다. 무지했던 나는 완전히 실명하게 되면 평생을 시설에 수용돼서 표백제 냄새가 밴 흙탕물 같던 된장국이나 마시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참한 미래가 예상되자 하루하루가 절망스러웠다.
2000년 서태지가 ‘울트라맨’을 외쳤다. 나는 그 노래가 세상을 저주하는 주문처럼 들렸다. 한때 우상이었던 그가 또다시 유일한 구원자였다.
“울트라맨. 어렸을 적 내 꿈은 울트라맨…”
복잡한 머릿속과 마음을 털어내고 싶었다. 기도문처럼 울트라맨을 불렀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를 장애인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품에 끼고 있다가 본인이 죽으면 어디 시설에 들어가든지 형제들에게 의탁해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암담한 미래가 나로서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명절 전날이었다. 나는 외갓집에 엄마 심부름을 갔다. 마당을 들어서며 인기척을 내려 하는데 열린 창으로 어른들의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내 이름이 거론되고 완전히 눈이 멀면 어쩌냐는 걱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읍내 침쟁이 남봉사 얘기를 꺼냈다. 그는 용한 침쟁이로 소문이 나 가정을 이루고 생계를 책임지고 산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혼란했던 마음을 정했다.
소리 나지 않게 마당을 되돌아 나왔다. 속으로 울트라맨을 불렀다. 조금씩 걸음에 속도를 높이며 입으로 울트라맨을 노래했다. 손으로 뺨을 훔치며 비명처럼 울트라맨을 외쳤다. 그때였다. 절망과 울분이 내 안에서 깨져 나가며 굳건한 의지 하나가 자리 잡았다. 결코 표백제 냄새 밴 된장국이나 받아먹는 미래를 살지 않으리라. 그날 엄마에게 장애인학교로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어떤 기술이라도 배워 내 밥벌이를 하고 살겠노라 말했다. <시리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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