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절대 권력의 저주, 토씨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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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당내 기반이 탄탄하고 당선 전에 이미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구축했다는 점에서 허수아비나 윤 전 대통령과는 딴판이다.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거기에 있다. 지난 정권 초기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이 ‘윤심’을 다투며 ‘진윤’과 ‘찐윤’을 구별했듯이,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도 ‘명심’ 경쟁이 치열하다. ‘진명’을 건너뛰어 ‘찐명’이 회자된다.
이 대통령은 대선 전에 이미 당권을 장악했다. 이 대통령의 강력한 경쟁자들이 당을 떠나 당내에는 이 대통령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 정당 민주주의에서 정부를 견제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제1야당인데,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여력조차 없다. 내란 정당의 이미지를 벗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성찰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영국 역사가이자 정치가였던 액턴 경은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했다. 절대 권력의 저주다. 준비된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권력은 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 여부는 이 저주를 어떻게 피하느냐에 달렸다. 이 대통령 스스로 자제하고 현명한 통치력을 발휘해 이 저주를 피할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조정과 통합의 정치를 주장하고 당선 직후 첫 국무회의에서는 국민의 대리인임을 강조했다. 국민에게는 대리인으로서 올바른 대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의 리더로서 국민 위임을 받아 조정과 통합의 정치를 이룩한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최고 공직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액턴 경의 격언은 권력자 스스로는 절대 권력의 저주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도적으로 권력 분립을 보장하거나 현실적으로 견제 세력이 존재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권력 구조는 제왕적 대통령제라고 불릴 정도로 대통령의 권력이 막강하므로 제도적 요건은 갖춰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실 정치에서 견제 세력이 존재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그조차도 여의치 않다.
다행히 지난 대선에서 국민이 먼저 견제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이 과반을 획득해 당선되었다면, 여당이 의회 다수를 장악하고 제1야당이 무력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그야말로 거칠 게 없을 것이다. 과반에 약간 못 미치는 지지표를 통해 국민은 이재명 후보에 대한 신뢰와 견제를 동시에 표현했다. 다른 한편으로 탄핵 정권의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에 40% 넘는 지지표를 줘 견제 역할을 맡기고자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에 이것은 오히려 계륵이 된 듯하다. 반성과 성찰을 통해 견제 세력으로 빠르게 거듭날 기회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언론과 시민사회다. 정당이 견제 역할을 상실한다면 언론과 시민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당 민주주의가 발전한 서유럽에서 언론과 시민사회는 정당이 약해질 때 정당 역할까지 수행함으로써 ‘제2의 정당’으로 불린다. 언론과 시민사회는 정당보다 국민에게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국민의 소리를 더 잘 대변할 수 있다.
절대 권력의 제도적 온상인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우리는 ‘계엄’이라는 극단적 방식으로 경험했다. 그 계엄에 대한 탄핵을 통해 태어난 새 정부는 제도적 근원을 제거할 소임을 갖는다. 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절대 권력의 저주가 시작되기 전에 권력 구조를 비롯한 제도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과 시민사회가 이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정부와 여당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토씨 같은 정치인을 원한다. 토씨는 체언·부사 혹은 어미 따위에 붙어 그 말과 다른 말의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말 뜻을 도와주는 품사를 말한다. 중요한 체언은 주권자인 국민이다. 토씨는 단지 체언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로도 만들고 목적어로도 만들어 그 격을 결정하고, 체언과 체언을 연결한다. 그러면서도 조사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대리와 통합의 정치가 토씨의 정치로 이어질 수 있도록 언론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개발된 자기부상열차가 시속 650㎞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자기부상열차로서 세계 최고 속도를 달성한 것으로, 지상 교통체계의 혁신을 부를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중국 매체 CGTN 등에 따르면 이달 중순 후베이성 소재 정부연구기관인 둥후 실험실 연구진은 자체 개발한 자기부상열차를 최고 시속 650㎞로 가속하는 데 성공했다.
해당 열차는 사람이 탑승하지 않는 성능 시험 용도이며, 중량은 1.1t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열차가 최고 속도에 도달한 시점은 정지 상태에서 단 7초 만이다. 출발 지점에서 600m를 지나던 순간이었다. 출발하자마자 땅 위에서 국내선 제트 여객기와 유사한 속도(시속 약 700㎞)를 냈다는 뜻이다. 제트 여객기는 지상 활주 뒤 공중으로 떠올라 이 정도 속도를 낼 때까지 수분 이상을 써야 한다.
초고속을 빠르게 실현하는 비결은 자기부상열차의 특징을 극대화한 연구진의 전자기 추진 시스템 덕분이다. 자기부상열차는 바퀴를 굴려 레일 위를 달리는 보통의 열차와는 주행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열차를 레일 위에 띄운 뒤 전진하는 힘을 모두 전자기력에서 뽑아낸다. 레일과의 마찰 자체가 없기 때문에 초고속을 신속히 구현하기 용이한데, 중국 연구진은 이 전자기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고성능 추진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다. 이번 열차의 또 다른 특징은 감속도 쉽다는 점이다. 단 200m 만에 최고 속도에서 완전히 정지하는 데 성공했다. 가속과 감속 모두 레일과의 마찰이 아니라 전자기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향후 연구진은 반복 시험을 통해 기술 안정화 수준을 높인 뒤 올해 말에는 시속 800㎞를 달성할 계획이다.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 최근 영화 유튜버 라이너는 윤석열·김건희를 모델로 한 오컬트 영화 <신명>에 대한 비판적인 리뷰를 남기며, <신명>처럼 현실의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를 그저 현실과 분리해 영화로만 보라는 것이 난센스임을 지적했다.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이 미신을 동반한 오컬트 장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라이너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비판했듯, 이태원 압사 사고 같은 고통스러운 참사의 기억을 주술에 의한 것으로 묘사하는 재현은 뜨악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해악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미신을 믿는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과, 그들의 사악한 주술이 실제로 통했다고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범주다. 후자를 진지하게 주장하거나 혹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호의적 관람평 중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현실이 오컬트 문법으로 재구성되는 게 아니라, 오컬트가 현실로 재구성된다. 미신을 믿는 위정자를 비판하려다 미신의 효험을 긍정하게 되는 역설. 그러니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다. 오컬트 장르를 그저 장르로만 즐기기 위해선 그런 미신이 현실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지난 5월 한 무속인이 악귀를 퇴치해야 한다며 조카에게 숯불 열기를 가해 살해한 사건 같은 게 아예 벌어지지 않거나, 최소한 이런 미신에 대한 의존이 헛짓거리이자 타인과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라는 것이 사회적 상식으로 단단히 합의되어야 그 믿음 위에서 주술적 가상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최근 <신명>의 흥행과 작품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보며 역시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컬트 장르물인 네이버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가 떠오른 건 그래서다. 온갖 술법과 영적 존재가 신화적 규모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만화는 <신명>과 비교도 안 될 만큼 허무맹랑할지 모르지만, 이 매혹적 세계관과 서사는 삿된 재주로 흔들 수 없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과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선팔도 최고의 무당 서연화의 외손녀로서 재능과 가르침을 물려받은 주인공 도미래가 여러 인연을 만나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가는 이야기 흐름에서, 온갖 악귀와 사술이 개입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건 술법의 우위가 아닌 선에 대한 믿음이다. 그와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이몽란과의 대결에서 그들은 우인술, 육비저주령, 손각시 등 다양한 술법을 주고받지만, 그 승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하찮지만 선한 터주신이 만들어낸다. 신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개조된 귀신의 집에서 원래 그곳의 터주신이던 두꺼비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한 미래는 “미약하기 때문에 절대 사라질 수 없는 한 조각의 선함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라며 “미약한 선함이 지켜온 이 한 뼘의 작은 터”에서 자신의 신력을 펼친다. 터와 터주 같은 개념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해 긴장감과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탁월하지만,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마나니 차크라니 하는 게 아닌 우리 본성의 선함을 따르는 순리에 있다는 관점이야말로 <미래의 골동품 가게>의 세계관을 더없이 탄탄하게 지탱한다.
멋진 가상으로 매혹하되, 미신으로 현실을 현혹하지 않는 것. 아마 잘 만든, 그리고 좋은 오컬트 장르물이란 그런 것이리라. 매 회차마다 때론 작품보다 더 긴 분량의 각주를 달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신화와 설화, 괴담을 전유해 세계관을 구성하면서도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현실에서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을 감내하기 어려울수록 미신에 빠져들기 쉽지만, 그 미신의 영험함이 순리의 편린에 불과하다면 그에 집착할 이유란 없다. 앞서의 이몽란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미래는 죽을 날까지 받아놓을 정도로 크게 살(煞)을 맞은 젊은 여성을 말 그대로 살려내지만, 그 여성이 정말로 구원을 받는 건 그 다음이다. 살을 맞기 전에도 이미 불운으로 압사하기 직전이던 그는, 미래의 도움으로 살아난 뒤 생각한다. ‘나도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 이 의지는 그의 운명까지 바꾼다. 미래가 보기에 살을 맞기 전에도 이미 “세상에서 쫓겨나고 스스로에게 쫓겨나 숨고자 해도 숨을 곳 하나 없는 그런 상”이었지만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강렬한 기운만으로도 형국이 변하고 운명이 변한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이몽란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인신공양을 하고 값싼 소원을 충족하는 무리는 스스로 ‘우리는 다음 세상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라 자부하지만, 그저 싸구려 미신에 미혹되어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오물통에 빠뜨린 아둔한 존재에 불과하다. 세상에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신묘한 세계와 존재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과 남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도리만큼 신묘하진 않다. 미래를 정녕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무격(巫覡)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이를 도와준 것에 대해 “그냥 이름 모를 누군가를 도와준 거예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요”라 말하는 마음에 있다. 또한 이것이 현대 배경 오컬트 만화로서의 <미래의 골동품 가게>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애초에 <신명>이 오컬트 영화로 기획되는 것이 적절했느냐는 의문과 별개로 현실 비판적인 오컬트 영화를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면 고민했어야 할 윤리적 전망이 이 작품에 선취되어 있다.
라이너는 <신명>에서 대통령의 계엄 성공 여부가 일본 주술사 대 한국 무당의 술법 대결로 결정된 것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노력을 무시한 것이라 온당하게 비판했지만, 오컬트적 문법 안에서 주술 대결은 당연히 서사의 하이라이트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신명>이 윤석열·김건희의 미신에 대한 추문을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주술의 사악함만을 부각하고 그에 대항할 선과 정의에 대한 전망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그에 반해 <미래의 골동품 가게>에서 서연화가 자신의 아치에너미이자 한때 당대 최고의 무당으로 군림하던 이매신의 악령과 싸우며 날린 일갈은 통쾌하다 못해 서늘하다. “사람의 생로병사와 환혼동각을 내다볼 줄 안다 하여 그것이 대단한 재주 같더냐? (중략) 자신이 가진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며 스스로에게 한순간도 머물지 못하고, 안마당에 갇힌 미친 개처럼 밖을 향해 짖어대다 제 성을 못 이겨 죽어자빠진 것 말곤, 네가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악의 교활함이란 실로 우둔하며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연화의 믿음과 <미래의 골동품 가게>의 세계관은 치열한 주술 대결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더 큰 싸움에서 선량한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낼 승리를 전망하고 예지한다. 최근 에피소드에서 젊은 시절의 연화는 독립군 신상욱을 만나 3.1 만세 운동을 부질없는 짓이라 폄훼하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바꿀 가장 신묘하고도 강대한 힘은 바로 인간다움의 순리에 있으므로, 광장은 승리한다. 주술 한일전으로 묘사되고 허무하게 끝난 <신명>의 하이라이트와 비교해 얼마나 매력적인 전망인가.
악은 그 어떤 현란한 개념과 사기로 덧칠해도 애초에 어리석고 자기 파괴적이며, 선은 당장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순간에조차 실은 가장 현명하고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무속과 괴력난신에 대한 자극적 소재주의에 빠지는 대신, 그 소재들의 원류인 신화와 설화와 종교에 깔린 상생의 이치를 동시대적 윤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방식으로 초자연적 세계를 구현한다. 이러한 접근과 전체적 완성도에서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역시 오컬트 수작이자 비슷한 미덕을 지닌 <파묘>보다 더 멀리 나아갔으며, 여전히 미신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이 적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무속을 바탕으로 한 한국형 오컬트 판타지가 고민해야 할 윤리에 대한 순도 높은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그러니 <신명>이든 어떤 작품이든, 지금 이곳의 한국 사회에서의 오컬트를 만들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작업을 하다 숨진 재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김충현씨의 사건을 수사 중인 노동당국이 서부발전 관계자를 입건했다.
26일 고용노동부 천안지청 등에 따르면 고인이 속했던 하청업체 한국파워O&M과 원청업체 한전KPS 관계자에 이어 발주처인 서부발전 관계자에 대해서도 수사에 착수했다.
앞서 충남경찰청 형사기동대 수사전담팀과 노동부 중대산업재해 수사관 등 80명은 지난 16일 서부발전 본사와 한전KPS 본사, 태안화력발전소 내 한전KPS 태안사무처, 한국파워O&M 사무실 등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노동당국은 원청·하청 업체 관계자에 대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입건했으며, 압수물 분석을 통해 발주처인 서부발전이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도 원청·하청 업체의 현장 실무자 등을 상대로 업무상과실치사 여부를 조사 중이다. 또 스마트폰·전자기기 기록 분석을 통해 고인과 나눴던 대화와 업무 운영 관련 지시 세부 사항 등을 파악하고 있다. 사고 당시 공작기계에 이상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한국산업안전공단에 분석을 의뢰했다.
김씨는 지난 2일 오후 2시46분쯤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 있는 태안화력발전소 내 9·10호기 종합정비동 1층 건물에서 기계에 끼여 숨졌다. 그는 정비 부품 등 공작물을 선반으로 깎는 작업을 하다 기계에 옷이 끼면서 말려들어가 사고를 당했다.
농촌 지역인 가상 마을 충북 ‘두손리’에는 95년생 유미지(박보영)가 산다. 미지는 학교 청소, 밭일, 슈퍼마켓 아르바이트 등 단기 일자리를 가리지 않는다. 노란 단발머리의 그는 늘 웃고 다녀 ‘캔디’라 불린다. 마을 어른들은 요양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살뜰히 챙기는 그를 기특해하면서도 내심 걱정한다.
옛 짝사랑 상대 호수(박진영)의 엄마 염분홍(김선영)이 미지를 따로 불러 건네는 충고는 사회 통념상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는 29일 종영을 앞둔 tvN <미지의 서울>은 사회의 시선에 맞추다간 나다움과 인간성을 잃기에 십상인 사회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내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묻는 드라마다. 멈추고 도망치는 일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위로하는 이 작품은 ‘힐링 드라마’라는 입소문으로 1화 시청률 3.6%로 출발해 지난 22일 10화에선 7.7%로 2배 이상 반등하며 높은 화제성을 모았다.
배우 박보영의 1인 2역 일란성 쌍둥이 연기가 극을 이끈다. 미지에게는 미래(박보영)라는 쌍둥이 언니가 있다. 선천성 심장병으로 유년기를 병원에서 보낸 인물이다. 학창 시절엔 공부를 곧잘 했다. 빛나는 재능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우직함으로 이뤄낸 결과다. 서울의 한 공기업에 다니는 그는 마냥 밝아 보이는 미지와 달리 묵묵하고 속 앓는 소리를 잘 못 한다. 사내 비리 고발에 동참한 이후 1년 넘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할머니 요양비 등 가족 부양을 생각하면 회사를 관둘 수도 없다.
<미지의 서울>은 미래가 자해를 결심할 정도로 코너에 몰린 것을 알게 된 미지가, 똑 닮은 얼굴을 이용해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잠깐 바꿔 살자’고 제안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깍쟁이 미래는 두손리에서 밭일을, 천방지축 미지는 서울에서 회사원 행세를 하게 된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내심 질투하던 자매는 역할을 바꾼 후에야 상대의 삶도 고단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박보영은 미지와 미래, 그리고 서로를 연기하는 두 사람까지 사실상 1인4역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1980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직전을 배경으로 일상을 살던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KBS 드라마 <오월의 청춘>(2021)을 집필한 이강 작가가 극본을 썼다.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과 마음을 울리는 대사로 호평을 받았던 그가 이번엔 ‘그냥 쉬었음’ 청년(구직이나 육아·가사, 통학 등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이들)이 50만명을 넘은 현재,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는 듯 청년들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이강 작가는 “겉보기엔 무탈하지만 이미 자신 안에서부터 흔들리고 지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모두가 저마다의 싸움을 치르는 중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극은 실패의 경험이 있거나 쉬어가고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적당한 때’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오히려 청년들을 무력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준다. 미지는 사실 학교 육상 대표로 금메달을 휩쓸며 빛나는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부상을 입으며, 꿈꿨던 서울로의 대학 진학이 무산된다. 이후 그는 3년간 방에 자신을 가둔 채 은둔한다.
은둔 중이던 미지가 외할머니 월순(차미경)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4화의 대사다. 이불을 푹 덮어쓴 그에게 월순은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말한다. 다 살려고 싸우는 것 아니냐고. 미지도 살려고 숨은 것이고, 아무리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라고.
<미지의 서울>은 용감한 도망자들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건넨다. 미지·미래와 러브라인을 형성하는 남자주인공들도 이에 해당한다. 미지의 짝사랑 상대 호수는 학창 시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인물이다.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1등’의 길을 따라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가 된 그는 뒤늦게 이 일이 자신과 맞는지를 고민한다.
미래가 일하게 되는 딸기밭 주인 세진(류경수)은 가까운 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서울살이에 회의를 느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온 인물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 등 도시에 지친 주인공이 시골 고향으로 내려와 힐링을 꾀하는 내용은 그간 많았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는 두손리를 관념적인 힐링의 공간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드라마는 ‘농촌’으로서의 마을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세진은 첫해 딸기 농사를 망쳐 골머리를 앓고, 미지는 일당 높은 밭일이라면 눈을 빛낸다.
미화되지 않는 서울과 두손리. 그리고 그 안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30대 청춘들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쌍둥이의 엄마 옥희(장영남), 미지와 일적으로 얽히는 로사식당 주인 김로사 시인(원미경) 등 중장년 캐릭터의 서사도 풀어내며, ‘다 큰 척’하지만 사실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 있건 두려움이 있기 마련인 우리네 삶을 이야기한다.
“어제는 지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모른다.” 미지가 큰마음을 먹을 때마다 외는 주문은 이 드라마가 건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오늘을 너무 두려워만 말고, 할 수 있는 만큼의 한 발을 내디뎌보자는 것. 하지만 나아가지 못했더라도, 오히려 후퇴했을지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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