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수납전문가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씨름 선수 출신과 K팝 기획자 ‘합작’…발라드로 대중들 오금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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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같은 남자는 지난 3월 SM C&C 수장 자리에 오른 박태현 대표(54)다. 샤프한 남자는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CAO(Chief A&R Officer·음반 기획 최고책임자·46)다. 이들은 SBS와 넷플릭스에서 지난 9월부터 방영 중인 음악 오디션 <우리들의 발라드>를 통해 한동안 침체됐던 발라드 장르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 아이돌과 트로트 쏠림 현상에 피로감을 느낀 이들에게 평균 나이 18.2세의 풋풋한 청년 출연자들이 재해석해 부르는 옛 발라드 명곡은 힐링이자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됐다. 부모 세대가 청년 시절 즐겨 듣던 음악을 자식 세대가 부르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화요일 예능 연속 1위, 넷플릭스 한국 톱 2~7위, 온라인 누적 영상 총 조회수 1억뷰를 일찌감치 돌파했다.
박태현 대표는 음악은 1도 모른다. 하지만 ‘촉’과 ‘뚝심’만큼은 남다르다. 이성수 CAO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NCT, 에스파 등 수십년간 SM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 음악을 기획해왔다. 이들은 모두가 실패할 거라며 고개를 흔든 발라드에 어쩌다 꽂혔을까.
프랑스어 ‘발라드(ballade)’는 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라는 뜻이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성수동 SM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박 대표와 이 CAO를 만나 그들의 발라드를 들었다.
# 박태현의 발라드
박태현 대표는 1971년 경남 의령군 가례면 우남리에서 면사무소 공무원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이 의령인 천하장사 이만기 선수가 의령중학교에 씨름부를 창단하면서 그도 1학년 때부터 씨름을 시작했다. 체급은 경량급이었다. 씨름감독이 자신의 전근지인 진주남중으로 그를 전학시켰을 만큼 씨름에 재능이 있었다. 중2 때 경남 씨름합숙훈련에서 마산중 3학년 강호동씨를 처음 만났다.
- 씨름을 왜 시작했습니까.
“학교에서 덩치 좀 크고 힘 좀 쓰게 생긴 아이들을 선발한 거예요. 저는 어린 마음에 공부하기 싫으니까 한다고 했고요.”
- 재미있었나요.
“잘했어요. 저를 데리고 간 씨름감독님의 하숙집에 잠깐 얹혀살던 때를 제외하면 중학교 시절 내내 혼자 하숙했는데, 세광고에 진학한 후부터는 어머니가 남동생을 데리고 진주로 아예 오셨어요. 본격적으로 씨름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제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였어요. 셋이 단칸방에서 살았어요. 어머니는 공사장 청소를 하고 나중엔 하숙도 치셨죠. 아버지는 면사무소 사직 후 받은 퇴직금을 주식 투자로 모두 날리셨어요. 집안이 풍비박산났죠.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저는 엄청 열심히 운동했어요. 장남인 내가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뚝심’의 박태현 SM C&C 대표
강호동 매니저로 연예계에 입문모래판 꿈 접었지만 승부욕 여전몸으로 배워온 남다른 ‘촉’ 적중대중들 발라드 감성 깨워 한판승
‘샤프’한 이성수 SM엔터 CAO
SM에서 K팝 세계화 이끈 산증인시대 흐름 따라 달라진 정서 반영‘우발’ 출연자 선곡·편곡에 도움단단한 음악적 기반 구축에 주력
사람들 마음에 파동 일으킨 두 남자
아이돌·트로트 피로감 느낄 즈음침체 겪던 발라드 장르 부활시켜부모세대의 음악, 자식들도 열광K팝의 다양성·가치 확장에 기여
- 얼마나 잘했습니까.
“경량급(금강급·80㎏ 이하)에서 항상 1~3위를 했어요. 그래서 경남대 체육교육과에 씨름특기생으로 전액장학금을 받고 입학(90학번)할 수 있었어요. 대학에 합격한 날이 제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 같아요. 중학생 때부터 제 꿈은 천하장사가 되는 거였어요. 그리고 씨름을 은퇴하면 체육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려면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했어요. 씨름은 선수로서 생명이 짧으니까요.”
- 대학 시절 씨름 성적은 좋았나요.
“날아다녔죠(웃음). 금강급에서 대통령기, 전국체전, 회장배를 비롯해 7관왕을 했어요. 운동의 기본은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근력운동이나 등산을 하면서 체력을 쌓고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씨름 실전훈련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매일 새벽부터 혼자 나가 운동하고, 저녁식사 후 모두가 쉴 때도 운동했어요. 승부욕이 강했거든요.”
-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많았죠(웃음). 선배들 군기가 엄청 세거든요. 고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이나 1, 2학년 때는 선배들한데 엄청 두들겨 맞았어요. 코치한테도 맞았고요. 그런데 선배들이 거의 장사급잖아요.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맞으면 장딴지까지 피멍이 시퍼렇게 내려왔어요.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한여름에도 긴 바지를 입어야 했어요. 앉을 때도 (통증을 덜 느끼려고) 옆으로 비스듬히 앉았고요.”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씨름연맹이 일본의 스모를 따라 가벼운 체급을 없애기로 하면서 대학 2학년 때인 1991년 9월 금강급이 폐지된 것이다. 이만기 선수처럼 ‘모래판의 황제’가 되려던 꿈이 한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해태유업 실업씨름단에서 2년여간 코치생활을 한 그는 1997년 경기도 양평 한 중학교의 체육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 교편을 잡았습니까.
“아뇨. 양평에 하숙집을 구하고 막 시작하려던 때에 강호동씨가 자주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아무런 얘기 없이 밥만 먹고 가곤 했죠. 중학교 때 합숙훈련에서 만난 후부터 가깝게 지냈거든요. 그런 어느 날 할 얘기가 있으니 서울로 잠깐 와보라고 해요. 같이 일하자는 거였어요. 씨름계 은퇴 이듬해인 1993년 방송인으로 전업한 강호동씨는 당시 유행어 ‘행님아’를 낳은 MBC <오늘은 좋은 날> ‘소나기’ 코너로 큰 인기를 끌었어요. 본격적으로 방송을 하려니 믿고 같이할 매니저가 필요했던 거예요.”
- 그래서 서울 삶이 시작됐군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러곤 일주일간 고민했죠. 새 삶을 결심한 이유는 훗날 태어날 제 자식에게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서였어요. 제가 시골에서 태어나 문화 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거든요. 진주, 마산이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어요. 1997년 여름에 상경해 강호동씨와 한집에서 7년간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며 매니저 일을 했어요.”(박 대표는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우주소녀 수빈이 딸이다.)
- 일에 적응이 잘되던가요.
“(손사래치며) 어휴, 촌에서 올라와 표준어도 못 써, 길도 몰라, 사람도 몰라… 그때는 내비게이션도 없었잖아요. 서울에 다리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강호동씨를 뒷자리에 태운 채 물어물어 다녔어요. 게다가 평생 씨름선수만 알았지 방송국 사람들을 모르잖아요. 처음 3~4년까지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느낌, 눈을 감고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고향에 돌아가 씨름감독이나 할까 고민할 때도 있었죠.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길이 보이고 방송국 사람들과도 친해지면서 적응을 했어요.”
강호동씨는 모든 방송사가 영입전쟁을 벌여온 대한민국 최고 스타다. 그만큼 흥행 보증수표다. 1996년 SBS <기쁜 우리 토요일>을 통해 개그에서 진행자로 옷을 갈아입은 그는 방송 3사를 종횡무진했다. <일요일은 즐거워> ‘캠퍼스 영상가요’, <오늘은 토요일> ‘강호동의 초전박살’(이상 KBS 2TV), <강호동의 천생연분>(MBC), <야심만만> (이상 SBS) 등 진행한 프로그램마다 대박이 났다.
- 혼자 하기엔 업무가 과중했겠어요.
“휴대폰 하나로 둘이서만 하다보니 너무 버거워서 2005년 팬텀엔터테인먼트로 들어갔어요. 제 직책은 이사였어요. 강호동씨 외에 박경림, 김성주씨, 그리고 팬텀이 DY엔터테인먼트를 합병하면서 신동엽, 유재석, 노홍철, 김용만씨도 소속 연기자가 됐죠. 이후 팬텀에서 나와 강호동씨와 둘이 있으면서 <1박2일> <스타킹> <강심장> 등을 했어요. 그때 세금 문제가 불거졌어요. 검찰이 각하 결정을 내리면서 강호동씨에 대한 오해가 풀렸지만 타격이 컸죠.”
- 매니지먼트를 하면서 겪은 최대의 위기였겠군요.
“힘들었어요. 하지만 배운 게 있어요. 겸손해졌어요.”
2012년 그는 SM C&C 매니지먼트 부문장(미디어부문 총괄이사)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수근, 김병만, 전현무, 서장훈씨와 배우들이 차례로 영입됐다.
- 강호동, 전현무, 서장훈씨 등 소속 연예인들을 오래도록 정상의 자리에 있게 한 매니지먼트 비결은 뭔가요.
“PD와 작가 성향, 기획안을 봐요. 자기 프로그램을 꼭 성공시키겠다는 끈기와 자존심이 있고 편집 노하우가 깊은 PD와 같이해야 해요. 또 작가는 대본은 물론 요즘 젊은층이 뭘 좋아하는지 등을 다 뽑아서 입혀주니까 중요하죠. 멤버 구성도 봐야 해요. 강호동씨와 이수근씨처럼 호흡이 척척 잘 맞아야 하거든요. PD와 작가가 아무리 맛있는 밥상을 차려줘도 연기자들이 맛있게 안 먹으면 소용 없어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출연료와 편성시간도 꼼꼼히 보죠. 시청률이 잘 나와야 우리 연기자들이 잘되고, 광고와 행사, 부가수익으로도 이어지니까요.”
그는 지난 3월 매니지먼트, 여행, 광고사업을 아우르는 SM C&C 대표가 됐다. 그는 승부수를 던졌다. SBS 음악 오디션 <우리들의 발라드> 제작 투자다. 박 대표는 “글로벌 종합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발돋움하려면 스타 가수 육성이 필요했다”며 “모회사인 SM엔터테인먼트에 없는 음악장르가 발라드였다”고 말했다. ‘발라드가 되겠냐’며 대다수가 반대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였다. 제작비 전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의 ‘촉’은 적중했다. 화요일 예능 연속 1위, 넷플릭스 한국 톱 2~7위, 주요 온라인 플랫폼 누적 조회수 1억뷰를 넘겼다. 이러한 성공에 이성수 SM엔터테인먼트 CAO의 역할이 컸다.
# 이성수의 발라드
이성수 CAO는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경기도 이천에서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목사인 아버지의 시골 교회에서 피아노를 쳤다. 교회음악, 클래식, 대중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좋아했다. 한국외대 국제통상학과에 입학한 1998년부터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모부가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다. 2005년 A&R(Artists and Repertoire·음반 기획·제작) 직원으로 입사했고 팀장, 그룹장, 프로듀싱 본부장을 거쳐 2020년 SM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됐다. 세계적 수준의 SM A&R팀과 프로듀싱 본부를 만든 일등공신이다. 2023년 경영권 분쟁 속에서 이수만 전 총괄이 SM엔터테인먼트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회사를 떠난 후, 스스로 대표 자리에서 내려왔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CAO로서 SM엔터테인먼트의 음악파트를 총괄하고 있고, SM의 계열법인으로 음악 퍼블리싱 전문 자회사인 크리에이션뮤직라이츠(KMR)를 설립해 일하고 있어요.”
- KMR은 어떤 회사인가요.
“전 세계 다양한 작곡가들과의 폭넓은 계약을 기반으로 수준 높은 데모와 곡을 제작하고 이 작품들이 SM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의 레이블과 아티스트들을 통해 정식 발매될 수 있도록 전 과정을 총괄·지원하는 회사예요. 현재 150명 정도의 국내외 작곡가가 저희와 전속 계약을 맺고 활동하고 계세요.”
- <우리들의 발라드>에선 어떤 역할을 한 겁니까.
“출연자들이 부를 곡의 편곡을 KMR 소속 작곡가들이 하세요. 반주를 넣기도 하고, 밴드가 직접 연주를 하는 등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지죠. 제작진과 함께 출연자들의 선곡에도 도움을 주고요.”
- 과거 미국,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등 전 세계를 다니며 유수한 작곡가·프로듀서와 네트워크(약 3000명)를 구축했다죠. SM엔터테인먼트 내부에 ‘Song Writing Camp’라는 집단창작 시스템을 주도해 만들었고요. <우리들의 발라드> 편곡도 집단창작을 통해 이뤄지나요.
“저희 회사 소속 추대관 작곡가님이 음악감독이신데, 1라운드에서는 동료 작곡가님들과 협업해 편곡을 하고 반주를 만들어 제공했어요. 2라운드부터는 라이브 밴드로 진행되며, 이 밴드를 통해 편곡과 연주가 이뤄지고 있고요. 프로그램 특성상 매우 한국적인 음악들과 정서를 표현하는 게 중요해 한국 작곡가들이 편곡을 하고 있는데요. 경연이 끝나고 나올 신곡 작업은 전 세계의 작곡가들이 같이 참여하고 계세요.”
- 멜로디는 살, 리듬은 뼈, 편곡은 옷이라더군요. 주로 1980~1990년대 발라드인 만큼 요즘 감각에 맞는 편곡이 필수였겠어요.
“당연하죠. 시대별로 음악 연주나 편곡 테크닉이 달라요. 예를 들어 똑같이 박자가 쿵, 빡, 쿵, 빡, 이라 해도 요즘엔 쿵, 쯔~팍, 쿵, 쯔~팍, 이런 식이거든요. 여기에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사운드 선택도 매우 중요해요. 똑같이 쿵, 빡인데 이걸 건조하게 표현하던 시기도, 리치(풍부)하게 입히는 때도 있어요. 음악이 나오는 그 시대, 그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운드가 선택된다고 볼 수 있죠. 다만 한 가지, 음악이 아무리 트렌디하게 변주되더라도, 시그니처 사운드가 등장하는 전주만으로도 아, 그 노래, 하고 떠올릴 수 있어야 해요.”
- 처음 <우리들의 발라드> 기획에 대해 들었을 때 성공을 예감했습니까.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그동안 발라드만 소재로 한 오디션 방송은 없었거든요. 한국인에게 가장 소구될 수 있는 장르도 발라드예요. 솔푸드 같은 음악인 거죠. 다만 한편으론 느린 템포 음악으로 대결을 벌이는 포맷이어서 저라면 투자 결정을 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박 대표님의 추진력을 보고 이 정도 결심이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최근 SM엔터테인먼트 산하 SM클래식스에서 재즈 트리오 앨범을 발표한 것처럼, K팝의 장르적 확장을 통해 보다 근본적이고 단단한 음악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취지도 있어요.”
- 음악인 시각에서 이 방송이 대중의 마음을 흔든 주요인은 뭐라 보나요.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좋은 발라드곡들이 수십년치가 쌓여 있잖아요. 그러니 일단 좋은 레퍼토리가 확보된 거죠. 가수가 아무리 훌륭해도 레퍼토리가 안 좋으면 쇼를 보러 가지 않겠죠. 검증된 가수들이 이미 많이 부른 곡들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사람들에게 지금껏 노출되지 않은, 완전히 풋풋해 내 아들·딸 또는 친구 같은 청년들이 무대에 선 것도 주효했던 것 같아요. 꾸밈없는 목소리와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니까요.”
# 두 남자가 부르는 ‘꿈’ 이야기
<우리들의 발라드>(12월2일 파이널 생방송)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출연자들과 전속 계약을 체결할 박 대표에게 지금 꾸는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판 요시모토흥업으로 회사를 키우겠다”고 말했다. 요시모토흥업은 수백명의 개그맨이 소속된 일본의 대형 연예기획사다. 자체적으로 방송도 제작한다. 이성수 CAO는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K팝을 비롯한 우리 문화가 국제사회에 더 큰 영향력과 가치를 전할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감 중인 김호중씨에게 수천만원대 뇌물을 요구한 소망교도소 교도관에 대해 법무부가 형사고발과 중징계 조치를 했다고 21일 밝혔다.
법무부는 이날 언론 공지를 통해 “서울지방교정청(광역특별사법경찰팀)이 진상조사를 한 결과 소망교도소 직원 A씨가 김씨에게 금전 차용을 요구한 사실과 그 과정에서 협박행위도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앞서 법무부는 A씨가 지난 9월말쯤 김씨에게 4000만원의 돈을 요구한 정황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지방교정청에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법무부는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소망교도소장에게 A씨를 뇌물요구죄, 공갈미수죄, 청탁금지법위반죄로 수사기관에 형사고발하고, 아울러 중징계 조치도 함께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무부는 유사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소망교도소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직원들에 대한 청렴교육도 지속적으로 시행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4월 음주운전 뺑소니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8월 소망교도소로 이감됐다. A씨는 김씨가 소망교도소에 입소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며, 그 대가로 4000만원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A씨 요구를 거역할 경우 향후 수감 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겠다는 압박을 받고 다른 교도관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는 두 사람 간 실제 금전 거래내역은 없으며 김씨 선발에 있어서 A씨의 영향력 행사도 없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경기 여주시에 있는 소망교도소는 2010년 12월 기독교 재단이 설립해 운영하는 국내 유일 민영교도소로, 교도관들 역시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다. 운영 예산의 90%가량을 국가에서 지원받고 있다. 정원 400명 가운데 결원이 발생하면 다른 교정시설 수감자를 대상으로 서류·면접을 거쳐 입소자를 선발하고 일반 교정시설보다 시설과 처우가 양호한 편이라 인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25일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순재는 무대와 방송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대중들의 배우’였다. 영화와 드라마, 시트콤, 연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연했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깊이 있는 연기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으며 국민 배우의 자리에 올랐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중국 지린성 옌지로 이주했고 네 살 때부터 서울에서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대전고등학교 시절 연극 <햄릿>을 무대에 올리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1956년 신영균, 이낙훈 등 동기들과 연극반을 재건하는 등 일찍이 연극과 연기에 열정을 싹틔웠다.
같은 해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으며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 <푸른지평선>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을 알렸다. 1960년 대학 졸업 후엔 허규, 유달훈, 김의경 등 연극인들과 의기투합해 국내 최초의 동인제 극단인 ‘실험극장’을 만들어 연극 무대에 나섰다.
1961년 KBS 개국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64년 TBC 공채 1기로 발탁되며 100편이 넘는 드라마에 출연했다. 1966년 영화 <초연>을 시작으로 <한>(유현목, 1967), <단발머리>(김수동, 1967), <빙점>(김수용, 1967), <막차로 온 손님들>(유현목, 1967)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스크린으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후 1980년대까지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주요 출연 드라마는 <나도 인간이 되련다>,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하지만, 단역으로 출연한 작품까지 포함하면 400편이 넘는다. 한 달에 3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다.
고인에게 대중적 인기를 가져다준 작품은 드라마였다. 1991년 57세의 나이로 출연한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대발이 아버지’ 이병호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최고 시청률 65%를 기록하며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국회의원으로서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목욕탕집 남자들>(1996), <허준>(1999), <이산>(2007), <엄마가 뿔났다>(2009) 등 주말 드라마에서 엄하지만 따뜻한 아버지와 스승 역할을 맡으며 ‘국민 아버지’ 반열에 오른다.
일일드라마와 사극, 현대극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70대에 또 한 번 전성기를 맞는다. 2006년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그간 보여준 엄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벗고 괴팍하면서도 허당끼 있는 한의원 원장 이순재로 변신해 코믹 연기를 펼쳤다. 극중 ‘야동’을 보다 들키는 ‘야동 순재’ 캐릭터로 대중에게 웃음을 안기며 젊은 층은 물론 어린이 팬들까지 생겨났다.
고인은 72세에 찍은 이 작품으로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일주일에 다섯 번 방영되는 탓에 강도 높은 촬영 일정을 견뎌야 했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가져다준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는 한 방송에서 “투병 중인 환자들이 ‘하이킥’을 볼 때 유일하게 웃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tvN의 여행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하며 예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나이를 잊은 열정을 보여준 그는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배우로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연극 무대로 돌아온 그는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에서 열연을 펼쳤다. 특히 <리어왕>에서는 200분 공연의 방대한 대사량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찬사를 받았다. 2023년에는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 배우들과 함께 대극장 무대에 올리며 연출자로도 첫발을 내디뎠다.
지난해 10월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기 전까지 그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마지막 연기 혼을 불태웠다.
한국 연극·방송계가 격변을 겪던 시기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배우는 평생 공부하는 직업”이라는 신념을 몸소 증명했다. 지난해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쓴소리를 해 주목받기도 했다. 그는 “연기가 쉽지 않다. 평생을 했는데도 안 되고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 늘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라며 “그동안에 연기를 아주 쉽게 생각했던 배우들 수백 명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최대한의 노력을 한 사람이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고 했다.
70년을 배우로 산 고인은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자기 관리와 지치지 않는 열정,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열린 마인드를 가진 진정한 어른이었다. 고령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뛰어난 암기력, 해박한 지식과 소양에서 나오는 작품 분석력, 정확한 한국어 구사와 대사 전달력, 허스키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발성은 배우 이순재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장점이라고 평가받았다.
연기를 향한 고인의 사랑은 후배들에게도 아낌없이 돌아갔다.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연기 현장에서는 철저한 준비와 진중한 자세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부족한 점은 거침없이 지적하는 스승이었다. 동시에 후배와 동료들을 위한 애정과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대중문화계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고인은 쉼없이 대중과 소통하며 호흡한 배우였다. 때로는 엄한 아버지로, 자애로운 스승으로, 친근한 이웃으로 대중을 위로하는 연기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KBS 역대 최고령 수상자 기록을 세운 그는 2007년 MBC 연예대상 이후 받는 첫 연기대상에 눈물을 흘렸다. 이순재는 당시 수상 소감에서 “‘언젠가는 기회가 한 번 오겠지’ 하면서 늘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이 아름다운 상, 귀한 상을 받게 됐다”라고 대중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유족으로는 부인 최희정씨와 아들 종혁씨, 딸 정은씨가 있다. 발인은 27일 오전 6시 20분, 장지는 경기 이천 에덴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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